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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가면 뭘 하고 싶어? "
그 물음이 단순히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던 날이었다.
" 아트렉스에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아, 그리고 꼭 섬멸부대로 이동해야지. 여기 소령님도 계신데 이동 정도야 못 하겠어? "
확신하지도 못 할 말을 뻔뻔히 내뱉고 나서야 질문의 의미를 이해했다. 스켈루스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던 지하 연구소의 자료들. 그러니 곧 이전의 질문은 '능력이 사라진다면'을 가정하고서 던진 말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츠이 슈메이는 동요하지 않았다. 동요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에 가깝다. 누군가의 말, 또는 행동, 또는 어떠한 상황에 휘둘리게 되는 것을 남들보다도 유독 기피하는 성질에서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회피한다 한들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 미래를 상상해보기 마련이다. 그러한 행위가 자신의 감정을 잡고 쥐흔든다면 망설임 없이 끊어낼 것이었다. 끊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자신. 더 나아가 츠이 슈메이라는 사람의 자유. 그렇게 츠이 슈메이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만약
만에 하나 내 능력이 사라진다면.
정말 만에 하나 죽어버린다면 나는 아마도 분명
부수고 부수고 또 부수고 팔다리가 잘리고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때까지 뛰어도, 깨트리고 찌르고 숨이 막힐 정도로 목을 조여봐도, 마치 사막 한복판에 떨어진 사람처럼 어떤 짓을 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시달릴 것이고,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그 아찔하고도 고통스러운 감각을 바라고, 또 바라고...
그렇게.
그렇게 허무하게 져버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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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눈을 뜬다. 끊어내야 할 순간이었다. 눕듯이 기대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안을 훑어본다. 집이라 부를 만한 것 하나 없이 6년을 지냈으니 짐이 적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페트레나 치안부대로 이동하기 전 섬멸부대에서 쓰던 녹음기 하나가 보인다. 왜 녹음기가 있냐고 묻는다면, 언제나 임무를 나가기 전 유서를 담아두는 것이 절차였으니까. 물론 츠이 슈메이는 단 한 번도 이 녹음기를 사용한 적이 없다. 따분한 짓거리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녹음기를 들어올려 전원을 켜본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작동은 잘 되나보다.
자그마한 변덕이 일었다.
막사 안에 녹음을 시작하는 안내 음성이 울려퍼졌다. 경쾌한 삑, 소리가 들리고 나면,
" ...아, 이런 거 진짜 귀찮은데. "
" 그래도 해준다. 내가. "
[ ... - 아, 아. ]
[ 오케이. 잘 들리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 ]
[ 뒤로 세 걸음, 오른쪽으로 두 걸음, 그리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츠이 슈메이님 멋지다 복창! ]
[ 응. 맞아. 그냥 한 번 시켜봤어. ]
[ 자. 내 막사로 가서 상자 하나만 찾으면 돼. 아마 제일 구석에 있을걸. 설마 못 찾진 않겠지. 어지간히 바보가 아니고서야. ]
[ 검은색에 붉은 줄이 있는 반지가 있을 거야. 아레스 반지거든. 그건 류얀한테 줘. 술 좀 줄이라고 전해주고. 넌 완두콩일 때가 귀여웠어. 지금은 안 귀여워. ]
[ 아, 포이베. 네 아버지 한 대 쳐주기로 했는데 못 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치만 너 할 수 있잖아. 혼자서도. 정 못 하겠으면 나 대신 다른 사람 찾아봐. 전부 네 친구들이니까. ]
[ 붉은 실에 보석 달린 팔찌도 있을 텐데, 그건 헬렌한테. 너 페트레나 데려오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내 상사한테라도 부탁해보던가? 성격은 안 좋은데 꼼꼼하긴 해. 그리고 동백꽃 말인데, 그거 지금 만들어 줘. 내가 필요 없다고 해놓고 웃기긴 한데 나 원래 이런 사람인 거 알지? ]
[ 쟈카르. 목걸이는 네가 가져가. 말했지, 이거 하나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고. 멍청했지. 그리고 정말이지 행복했어.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
[ 테오 모렐. 내 군번줄 줄 테니까 아트렉스는 가 봐. 네 캡틴한테 나 소개해주기로 했잖아. 그렇지, 우리 집 주소도 알려줄게. 얼굴만 봐도 내가 한 대 치려 한 사람이 누군지 알 걸! 그리고 노을은...
...다음에. 다음에 보자. 멍청아. ]
[ 에드거. 그러고 보니 돌아와서 대답해주기로 했었지. 나도 너 좋다, 됐어? 죽으면 동생 취소라고 했는데 내가 죽어버렸다. 헉, 큰일 났네. 그래도 봐줘. 알았지? 그러니까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야. 잘 자, 내 동생. ]
[ 야. 놓아 다쿠아즈 헤테로. 뉴스에서 진짜로 내 이름 보면 뒷목 잡았을 거면서! 나중에 만나면 제대로 알려줘. 누굴 기억하려고 했던 건지. 감질나게만 대답해주고 말이야. 잘 살아, 바보야. ]
[ 네 목표 내가 망쳤네. 근데 화내지 마라? 나도 죽고 싶어서 죽은 거 아니거든! 사실 너한텐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나 너 안 싫어해. 이안. 네가 쫓기는 것 같은 모습이 보기 싫었던 거지.
... ...나도 쪽팔리니까 웃기만 해봐. ]
[ 끝까지 고추장이라고 부르더라, 간장 대가리. 괘씸한 자식. 죽기 전에 너한테 권력의 맛을 화끈하게 보여줬어야 했는데. 뭐, 넌 딱히 신경 안 써도 알아서 잘 살 것 같다. 다음에 보자. ]
[ 그리고 아마 단검이 하나 있을 거야. 붉은색 노리개 달린 거, 그건 내 상사님한테 줘.
도화연. 넌 너무 약해. 몸 말하는 거 아니야. 분명 막사 들어가서 혼자 질질 짰을걸. 그치? 아니면 말고.
...네 꿈에 내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살아, 꼰대야. 다음에 보자. ]
[ 플로라. 내가 말했잖아, 걱정 좀 줄이라고. 그만 울어. 넌 울면 못생겼어. 돌아가면 이 일 그만둔다고 했지? 퇴직금에 보태라. 완전 콩알만 한 돈이긴 한데 없는 것보다야 낫잖아! 여전히 구원자니 희망이니 다 관심 없지만... 난 지금도 너의 희망일까? 그건 좀 궁금하네. ]
[ 헤카테. 넌 나보다도 몸 안 좋잖아. 나갈 때마다 불안하더라, 허약아! 자양강장제 하나 사뒀는데 이건 너 가져. 너도 울지 마, 울면 못생긴 것들이 계속 울고 그러냐. 난 네 웃는 얼굴이 좋다고 했잖아. ]
[ 사실 이거 쓰라고 주는 건 아니고, 그나마 줄 거라면 네 능력이랑 제일 잘 어울려서? 리베라. 예전에 네가 그랬지. 뭘 해도, 어떻게 변해도 츠이는 츠이라고. 그 말이 한동안 계속 생각나더라. 덕분에 죄책감 없이 많이 부수고 다녔지! 농담이야. 아무튼, 잘 살아. ]
[ 바이스. 관광 코스 이제 못 쓰겠네. 네 등에 매달리는 거 버릇된 것 같은데 아마 넌 내가 매달린 줄도 모르겠지? 귀걸이는 너 가져. 왜 한 짝밖에 없냐면... 일하다가 잃어버렸거든! 울지 말고 무너지지도 마. 아, 막사 서랍 첫 번째 칸 열어보면 편지가 있거든. 너랑 주고받았던 거야. 다음에 보자, 내 친구. ]
[ 혹시 몰라서 말해두는데 그것들 그냥 주는 거 아니다? 맡긴 거지. 다 찾으러 갈 거니까 안 망가지게 가지고 있으라고. ]
[ 어우, 사람이 좀 많아야지. 이제 줄 것도 없어. ]
[ 아. 그리고 - ]
[ 후발대원 분들, 집합하십시오! 출발합니다! ]
[ ...음, 뭐. 됐다. ]
[ 다녀올게. 바보들아. ]
류얀 - 아레스 반지
헬렌 밀러 - 팔찌
쟈카르 에인헤랴르 - 목걸이
테오 모렐 - 군번줄
도화연 - 단검과 노리개
플로라 - 47,000베니
헤카테 - 자양강장제 감마
리베라 - 섬광탄 두 개
바이스 - 귀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