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참으로 간사하다.
무척 기쁘거나,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괴롭거나 하는 짙은 감정의 파편이 꽃히면 꽃힐 수록 기억이라는 존재는 더욱더 확실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기억은 잔잔한 호수처럼 머물러 있다가, 저도 모르는 새에 파도를 일으켜 단편적인 장면을 띄워주곤 한다.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물론 아메티스타 인베르노는 이를 조절할 수 있는 이였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말이다. 예컨대, 자신의 내면에 오래 남아있어야 마땅한 순간들은 사라지지 않게, 먼지처럼 흩어져도 별 의미가 없는 순간들은 빠르게 사라지도록 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라일라 M. 세실리아와 대화를 하는 이 순간 순간의 목소리와 빛과 그림자와 눈 앞의 너라는 사람은 아메티스타 인베르노에게 기억해야할 가치가 있는가?
"글쎄요... 내가 뺨을 치는 것만으로는 아메티스타 선배의 기억에 남을 순 없을 것 같은 걸요."
감히 내게 손을 휘두른 발칙한 인간. 혹은 하라고 했다고 정말 하는 의외의 면을 가진 후배. 정도로 기억하겠지. 그렇게 정의한 뒤 마주 너의 뺨을 후려칠 것이 분명했다. 손을 뻗는 네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 아메티스타 인베르노는 이미 그 준비를 마치고도 남았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해진 것이 있어요."
고통이 느껴질 거라 예상했던 한쪽 뺨에는 부드러운 감각이 스치듯 닿았다.
"반대로 선배님이 제 기억에 그만큼 강렬하게 남게 된다면... 과연 어떤 행동이어야 할까, 하는 궁금증이요."
아메티스타 인베르노는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 그 행동이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의미인가, 혹은 자신이 그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의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너는 이 행동을 끝마칠 수 없다는 것을 돌려 말하는 걸까. 사람을 파악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는 아메티스타 인베르노도 이에 대한 답은 스스로 내리지 못했다. 하고자 하는 말을 숨기지도 참지도 않는 이 사람은 기어코 말을 뱉었다.
"그래서?"
거만하지 않았다. 너를 깔보지도 않았다. 궁금해졌기에 물어보는 당연한 계기와 결과였다.
"내가 당신에게 강렬하게 기억되기 위해선 어떤 행동을 해야할지 묻는 건가요?"
"그건 내가, 아니면 당신이?"
잠시 고민하는 간극이 생긴다. 전자라면 답은 정해져 있고, 후자라면... 그건 내게 물어볼 게 아니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다. 그렇다면 전자에 더 가까울까? 잠시동안의 시간조차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 너의 동그란 눈동자를 마주한다.
"라일라 M. 세실리아. 네 기억 속에 내가 대단히 강렬하게 남아있기를 원하나?"
원한, 혐오, 멸시. 혹은 감사, 은혜, 존경. 그 어떤 감정의 결조차 없다. 그러니 너를 아끼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손에 들고 있는 꽃 한 송이, 방 안의 화병에 담겨 있는 시든 꽃과 다를 바가 없다.
"너의 문장이 한정적이니 그 안에서 내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군. 만약 그러길 바라는 거라면 기꺼이 그리 해주도록 하겠습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깊은 감정을 전달하는 이를 더 쉽게 기억할 것 같아요.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당신을 사랑하거나, 혹은 숨이 꽉 조일 정도로 당신을 싫어하거나. 그렇다면 아무 감정도 없는 이는 어떨까요. 어떠한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물음의 답은 너에게서 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아메티스타 인베르노는 제 꽃이 들린 손을 높이 들었다. 느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팔을 휘둘러 살짝 홍조가 오른 너의 새하얀 뺨을 그대로 내리쳤다. 부드러운 꽃잎이 두 사람 주위에 흩어지고야 말았다.
"자. 이제 감상을 읊어보세요."
눈처럼 새하얀 꽃잎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는 그 광경은, 결단코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기억 속에 나라는 사람이 새겨졌나요?"
아메티스타 인베르노는 웃었다.
그가 뱉는 모든 문장이 곧 정답이다.
그는 당신을 아주 조금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