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니나는 뭐 하고 산다니?
어느 날 가족들이 제게 물었다. 그냥, 그냥 잘 있대. 너의 소식을 듣기 전이었을 것이다. 애매한 대답밖에는 내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짧은 휴가를 마치고 기사단으로 복귀했을 즈음, 결국 상관에게 쓴소리를 듣고야 말았음에도 그 귀한 장기 휴가를 복귀하자마자 써버렸다. 마차를 타고 너에게 가던 길 숲과 나무가 가득하더라. 덕분에 네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려 걱정이 짙어졌다. 불안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다정한 말 몇 마디를 속삭여 줬을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다시 돌아오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나 짬밥 좀 먹었잖아. 일어나지 마. 내가 해줄게. 다른 말들은 삼켰다. 역시 그만두자. 다른 일 하면서 살자. 아니야, 다시 돌아와. 아마도 제 안에서 뱉어선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나 보지.
잘, 지냈을까? 그 잠깐의 간극이 네가 모든 것을 알아챘음을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너는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배려일까? 혹은…
…너의 자리를 내가 멋대로 앉힌 것만 같았다. 니나, 같이 기사단에 가자. 그런 게 아닌 것을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그리 느꼈다. 태어난 자리 떠나 제 마을보다 배는 더 큰 도시에 머무는데도 이 자리가 꼭 내 자리인 것만 같았다. 아카데미 다닐 적 모든 날 동안 바라고 바랐던 자리이기에 놓을 생각은 추호도 생기지 않았다. 당연하다. 그래서 너에게 닿았던 시선이 잠시 흩어졌나 보다. 제 신경 하나쯤은 남겨뒀어야 했는데 내 몸 하나 이 자리에 맞게 누르고 밀어 넣다 보니 정신이 없었나 보다. 그래선 안 됐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겁 많고 유약한 너에게 소홀해져선 안 됐는데. 그러니 로리카 피델레가 느끼는 죄책감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노라 말할 수 있다.
모르겠어. 너는 그리웠을까? 너를 해치고 만 이 자리를?
그래서 돌아왔어. 너는 그리웠구나. 잉크 흥건히 번져 흔적 하나 찾아내기도 힘든 이 자리가.
네 그리움과 너에게 다가갈 위험을 감히 천칭에 올려본다. 어느 쪽으로 기울지 저도 알지 못하니 찬찬히 바라보고만 있자면 갑자기 똑, 하고. 무언가 떨어진다. 뜨겁지 않았고 차갑지도 않았다. 마치 네 상냥한 불길처럼. 그래서 돌아왔어, 라고. 고맙다고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 갈 곳 잃어 흩어진 감정들을 이제서야 줍기엔 늦어버렸다.
“니나.”
겨우 이름 하나를 읊을 수 있었다. 이에 안도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긴 휴가를 마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다시 복귀했을 적에, 너를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동시에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하면서, 그런데,
그런데도 네가 그리워서 돌아왔으면 했어.
너를 유난히 아껴버려서 결국 후회할 바람을 택했어.
“나는 잘 지냈어.”
사실일 것이다. 아마도. 10년을 전부 기억해내기엔 무리가 있으니 제가 기억하는 단편적인 조각들을 맞춰본다면 아마도 그렇다.
“너무 잘 지내버렸어. 네가 어찌 살고 있는지 신경 쓸 틈도 없을 정도로.”
그래서 미안해. 하지만 사과할 일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 입 밖으로 뱉지 않는다. 손으로 느릿하게 네 눈가를 닦아주니 더더욱 두 눈에 열이 차오른다. 참았다. 흐르게 두고 싶지 않다. 얄팍한 자존심. 이것 하나만은 지독하게 여전했다.
“돌아오니 어때?”
스물하고도 일곱 해를 살았다. 수많은 죽음을 등에 업고 이 자리에 있다.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 그래도 어찌 되었든 너에게 나는 로리카 피델레일 테니까.
“기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기쁘네.”
네 불길은 언제나 따스했다. 전장에 나가선 뜨겁게 타오르면서도 내게 닿을 때면 그렇게나 온정이 넘치더라. 그 온기가 마냥 좋았다. 그렇기에 사그라들어버린 불길이 파도에 휩쓸릴 때 차마 그쪽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도주 포기하세요. 공격에 집중합니다. 침착한 어조. 뒤틀리는 속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눈가를 닦아주던 손이 떨어진 뒤에 찬찬히 눈을 마주한다. 왜 웃냐며 타박할 땐 언제고 정작 우는 얼굴 바라보니 속이 쓰렸다.
“다른 건 다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타임이라 부르지 않는 것 또한 스스로 꺾지 않은 고집 중 하나. 역시 어른 되려면 멀었지. 하지만 평생 철없이 살아간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칙칙하고 재미없게 변해갈지언정 지나온 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바라는 것이 적어지고 추억하는 시간이 길어져도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다. 니나 타임 골든데이. 니나 골든데이. 속으로 반복해 불러보는 이름. 바깥에서 순찰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슬슬 일어날 때가 되었다. 혹은 대충 빠진 뒤 모닥불에 숨어 쉬어도 괜찮을 것이다.
“죽지만 마.”
부르는 소리가 점차 멎은 뒤에야 맺지 못한 말 이어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고 일어나라는 듯 손을 뻗었다.
“살아만 있으세요. 그거면 됩니다.”
내 자리는 이곳이다.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을 하면 그만인 것이다. 결코 유약하지 않은 시선은 올곧게 정면을 향한다. 멋대로 올려둔 천칭을 내려두었다. 제가 저울질할 게 아니다. 그러니 너에게 넘긴다. 네가 판단하기를 바란다. 네 자리가 어디인지 스스로 알아채기를 바란다. 얼마나 걸리든, 어떻게 변하든.
그 길옆에는 언제나 내가 존재할 게 분명하니까.